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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법제위원회 | 대한민국 바르게 세우자!

배종균 0 4395

제주 4,3 사건 행불자의 묘역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9월 7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곧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된다. 1946년 12월 남로당 전남도당부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고, 초대위원장에 안세훈(安世勳), 부위원장에 이신호(李辛祜) 조몽구(趙夢九) 김유환(金瑬煥)이 선출된다. 여기에 부녀부에 이정숙(李貞淑) 고진희(高珍姬) 김진선(金鎭善)의 이름이 보인다.   


제주도부녀동맹(婦女同盟)은 1947년 1월 25일 결성되어, 위원장 김이환(金二煥), 부위원장 고인선(高仁善)·강어영(康御英), 그리고 고덕순(高德順) 등 80여명이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부녀동맹 간부들은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었다. 김이환은 개회사를 통해 "조선의 해방은 8할 이상을 점하고 있는 무산대중과 1천 5백만 여성의 해방 없이는 도저히 기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직체를 가짐으로써 이를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2월 21일 제주읍 부녀동맹이 결성되고, 위원장 고인식(高仁植), 부위원장 강청열(梁淸烈)·김금순(金錦順), 집행위원 강소희(姜膆熙) 등 30명이 선출되었다.


이어 전도적으로 ‘3‧1투쟁기념행사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선전동원부에 다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부녀부 이정숙의 이름을 울렸다. 부녀동맹 간부들이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47년 ‘3․1사건’ 부터였다. 그에 대한 검속은 3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부녀동맹 회원을 중심으로 부르던 노래가사는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웃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어도/ 혁명정신 살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부녀동맹 위원장 김이환은 경찰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전면에 나섰고, 결국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는 “성명서에 대해서는 그날의 진상을 아는 자는 누구나 성명서를 발표 아니 하지 못할 것이다.”고 강변, 눈길을 끌었다.  3·1사건 피고인 가운데  고진희는 5월 10일 공판에서 체형 5개월, 벌금 2000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고진희에 대한 삐라 살포, 성명서 첨부, 무허가 집회에 관한 사실심리도 있었다. 


제주4·3 무장봉기가 시작되기 전 면리(面里)에 자위대가 편성되었으며, 한라산 등 산악과 밀림지대 등 각 지구에 유격대(遊擊隊)가 편성되었다.


4· 3이 발발하자 여성들 중 일부는 산으로 올라갔지만 대부분은 마을에 남아 무장대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식량이나 의복 등 생활 물자를 무장대에게 공급하는 일을 하게 된다. 

 1948년 11월 읍내 여성들도 헌병대에 줄줄이 끌려 들어갔다. 끌려간 여성은 △강어영(康御英, 道부녀동맹 부위원장) △강염숙(姜念淑) △고숙자 △고지영(高芝英, 의사 朴永勳의 아내) △고혜영(高蕙英, 조선소 사장 高昌基의 아내) △김보배(民戰조사부장인 鄭相朝의 아내) △양청열(梁淸烈, 邑부녀동맹 부위원장. 민족청년단 창설멤버인 文奉澤의 아내) △이순실(李順實, 도청 金王辰 과장의 아내) △이순손(李順孫) △최정숙(崔貞淑, 의사. 최원순 법원장의 딸. 제주도교육감 역임) △한여택 △홍종춘 등이다.  


강염숙이 맨 처음 끌려간 곳은 헌병대였다. 그곳에는 읍내 유지급 여성들이 가득했다. 김이환·고인식 등도 있었다. 헌병들은 ‘부녀회가 부녀동맹으로 바뀐 후 간부들의 명단과 활동상황을 밝히라’며 추궁했다. 부녀동맹 간부였던 양청열은 산에 쌀을 올린 혐의를 받았고, 홍종춘은 전기고문을 받았다. 김금순과 김영아는 결국 희생되었다.


강상유(姜相幽)는 4․3 당시엔 홀로 된 상태였다. 강상유는 얼굴이 고왔다.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대위가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녀를 죽여버렸다. 강상유는 당시 사회활동을 하던 여성들과 같은 그룹인데다가 그녀의 오빠 강상호(姜相鎬)는 일제시대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한편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가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북조선 해주에서 열렸다. 제주도 인민대표 안세훈·김달삼(金達三)·강규찬(姜圭讚)·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 등 6명이 참석하였다. 남한의 각 지역 대표 1080명 가운데 1002명이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안세훈· 김달삼·강규찬· 이정숙·고진희가 대의원에 뽑혔다.


‘제주도 인민에 대한 살상을 곧 중지하라고 29일 민주여성동맹에서도 다음과 같이 강경히 요구하였다. “(1) 지난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망국 단선 등록을 강요하려는 위협, 폭압에 대항하여 궐기한 애국인민에 대한 살상을 자행하며, 폭압은 거익(去益) 대규모로 확대되어 계속되고 있다. (2) 제주도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대하여 무한한 감격과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본 여맹은 전 여성과 함께 애국인민에 대한 살상을 곧 중지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여 단호 항의하는 바이다.”’-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1947년 7월 15일/제주여중 파업(정보요약 제18호) 제2부: 방첩대 정보보고/ 24군단 971방첩대


(중략)2. 전복행위  a. 급진주의자 (2) 학교파업: 47년 6월 2일 제주도의 제주여중학교 3학년 학생 약 180여명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여학생들은 좀 더 질 높은 형태의 교과과정, 파시즘 교육 반대, 학교내의 파시즘 요소 제거, 교장의 행동에 대한 정정 등을 요구했다. 어떠한 정치적인 연계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파시즘에 반대하는 익숙한 주장이다. (후략)'-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민정정보국 정보요약(Civil Intelligence Section, Periodical Summary)


‘[제주] 현하 각 중등학교에서는 배속장교가 있어 학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나 제주도에는 아직 배속장교가 배치되지 않고 있는데  군사훈련교육의 긴급성에 비추어 독립대대장 김용주(金龍周) 중령의 특별조치로 현역장교를 제주읍 각 남녀중등학교에 배치하였는데 제주여중과 제주중학에는 강성희(姜成熙)중위가 취임하였다.’-서울신문 1949년 9월 17일


4·3당시 토벌대에 의한 여성의 수난은 집단강간과 반인륜적인 성폭력을 동반하였다. 임산부를 "빨갱이 종자이므로 없애야 한다"면서 총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행자 중 남녀를 지목하여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하거나 성기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폭파시켰다. '빨갱이년' 혹은 '빨갱이 가족'이라 하여 남편이나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대신 무고하게 학살당하고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이를 대살(代殺)이라 하였다.


“나는 1949년 1월경 여러 사람과 경찰서와 헌병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렸어요. 헌병대로 옮겨진 후에는 전깃줄을 엄지손가락이나 뺨에 대는 전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2주일 정도 수감되어 나왔지만 산에서 심부름하던 처녀들은 희생이 컸습니다. 아무개 처녀는 순경이 자신과 결혼을 하면 살려주마고 했지만 끝내 거절하여 죽었습니다. 또 아무개 처녀는 '다라쿳' 목장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산채로 유방이 도려졌어요.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땅바닥을 긁어 대 손톱이 다 빠졌고 그녀가 죽은 부근에는 잔디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이춘형(李春珩, 96년 채록, 채록당시 82세)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명과 총각 한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사람이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 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 버렸어.”-좌봉(左奉), 94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서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경찰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 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사태 진압이 어려워진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육지 출신의 특별수사대 경감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김호겸(金浩謙, 4·3당시 서귀포 경찰서장,  96년 채록, 채록당시 80세)


[윗글은 제주 4,3사건의 일부이며 나는 이러한 사건의 전후를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재 조명하건데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잡고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며 인간의 양심에 반하므로 앞으로 대한 민국 국민을 유린하려드는 그 어떤 세력에도 강력히 경고하는 이유입니다. ]  어부지리로 얻은 해방으로 일본인들 마져 대한민국에 그대로 남아 친일민국을 재건한 이땅은 아직도 친일민국으로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36년간 식민지로 수익을 누린 매국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이용하여 친일민국을 세웠고 10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일민국의 나라가 대한민국 국민을 유린하고 있음에도 국민들은 눈과 귀가 멀어 깨닫지 못함에 있습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혀를 깨물고 죽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현실을 보며 지금부터라도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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