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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공감이란 무엇일까?

감정이 없는 아이에게서 깨닫는 사회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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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린 비평단 Posted20-04-28 21:52 Comments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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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인 윤재는 편도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작게 태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윤재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 생기는 문제가 점점 눈에 보이고 늘어나다 보니 윤재의 엄마는 윤재에게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는 여러 규칙들을 설명해주고 가르쳐준다. 그렇게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의 손에 커가는데 크리스마스이브, 윤재의 생일날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고 돌아가던 도중, 엄마가 다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사고를 겪는다. 병원으로 위중한 엄마를 보러 가던 도중, 윤교수라는 남자를 만나 윤교수의 아내에게 아들 행세를 해준다. 그 후, 윤교수의 아내 장례식에서 곤이라는 윤재와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아이는 윤교수 부부의 잃어버린 실제 아들이었다. 윤교수가 곤이를 찾았을 때는 이미 불량해질 대로 불량해진 곤이만 남았을 뿐이였다. 곤이와 윤재는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고 서로를 점차 알아가며 좋은 친구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는 와중, 윤재는 도라라는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자아이를 알게 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윤재는 곤이와 도라를 만나면서 우정, 걱정, 사랑 등의 감정을 느끼면서 성장하게 된다. 곤이가 위험 처했을 때 윤재는 위험을 무릎 쓰고 곤이를 구하면서 심한 부상을 입게 된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윤재의 엄마는 기적처럼 일어나 윤재를 보러왔고 윤재가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을 알고 윤재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몬드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과연 옳은공감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옳은 공감이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 ‘옳은이라는 단어는 개인마다 기준이 다르며 또한 도덕적인 가치관마저 다르기 때문이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라는 말은 이 책의 구절 중 하나이다. 우리는 평소 여러 통신 매체 등을 통해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 이야기가 끝난 뒤, 거의 대부분은 기부를 하여 도와달라는 문구가 뜨곤 한다. 과연 그 문구를 보고 기부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한 번이라도 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이 있는가? 물론 여러 통신 매체를 통해 도움을 받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 상황을 우리나라로 한정 짓지 말고 세계로 확장해 더 크게 바라보자. 아프리카에서 힘들게 사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나온다. 도대체 왜 끊임없이 나올까? 그 나라의 경제적인 상황에도 영향이 있겠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까? 여기서 이 책의 말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너무 멀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자신의 공감이라는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학교폭력, 가정폭력 등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보고 우리는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경험이 있는가? 여러 학교폭력 사례들과 가정폭력 사례 등을 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지 않아 심각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는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너무 가깝다고, 너무 두렵다고, 자신들의 공감이라는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윤재는 이러한 상황을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분명 엄마는 어려운 사람에게는 공감하고, 도와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회를 윤재는 이상하게 여긴다. 사람들은 공감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신이 사용하고 싶을 때만 사용한다. 얼마나 이기적인가? 이 사례로 지난 몇 년간 악플에 시달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여러 연예인들이 있다. 이 연예인들에게 악플이 쏟아졌을 때 그만하라고 외친 사람과 위로를 해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결국 이 죽음의 비극도 사람들의 공감에서 온 것이다.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한 후에 사람들은 그제야 공감하는 듯, 다 함께 악플러들을 비난했다. 이 상황 또한 사람들이 자신이 원할 때만 공감이라는 감정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옳은공감을 해야 한다. 과연 그 옳은공감이란 무엇일까?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멀던, 가깝던 도움을 주려 노력하는 것일까? 공감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다. ‘옳은공감이란 적어도 그 사람의 상황과 고통을 이해해주며 따뜻한 관심이나 위로를 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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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출처]
도서 아몬드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pajuhoakeorj/221305768994
인쇄매체 이아린 비평단
E-mail : dkdldbxlsxkq@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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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4'

안태희님의 댓글

안태희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라는 단어를 자주 말하면서도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거리와 관계없이 모두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눠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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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Soldaten FürdieFreiheit Der-Menschheit님의 댓글

Ein-Soldaten Fü…

여기서 우리는 공감을 두 가지로 나눠야 한다. 만약 공감을 받는 대상이 A라고 하면, 나는 그를 낮춰 보면서 공감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공감을 보일 수도 있다. 첫 번째 공감은 다른 사람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감'이라는 탈을 쓴 전체주의에 불과하다. 결국 유일하게 가능한 공감은 두 번째, 즉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느끼는 공감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공감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까? 결코 내 의견이 상대방과 동일할 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누구와도 공감을 나눌 수 없다. 더 진행하자면,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나는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함을 통해 상대방에서 내 생각 밖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 즉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크 데리다가 용서에 대해서 한 말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무한한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메세지를 보낼 때만 가능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이론을 빌리자면, 구원의 솢길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총체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올 것이고, 이때 진보라는 이름 하에 쓰러진 수많은 이름없는 용사들의 이름이 모두 다시 불리어서 현재로 되살려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천사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한다. 동시에 현재 프롤레타리아트의 끊임없는 가능성을 허용하기 위해서 행동할 때,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천안문에 탱크가 돌진할 때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 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공감은 오직 과거의 고통을 다시 불러오고 미래에 필요하면 곁에 계속 있을 것을 서약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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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Soldaten FürdieFreiheit Der-Menschheit님의 댓글

Ein-Soldaten Fü… 댓글의 댓글

돌아보면서 더 생각나는 내용이 있어서 게시합니다.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만약 내가 소리를 지른다면, 천사들의 위계질서와 조직들 속에서 과연 누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위의 줄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의 첫 번째 문장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외가 연상되는 이 순간에서 '나"에게 내려지는 구원의 손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나'가 혼자일 때 말이죠. 그러나 단 "천사들의 위계질서와 조직들" 중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더 나아가 내 목소리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의 소외감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즉,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소외된 '나'에게 누군가 다가가서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타인도 있다는 사실을 지각시킬 때 공감은 그 원형적 모습, 즉 정치의 원형이기도 한 '다양성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띄게 됩니다. 이때 공감은 타인을 침해할 수도, 역으로 침해당할 수도 없는 구조이며, 오직 상호간의 존재를 확인함을 통해 더욱 강화되는 구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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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님의 댓글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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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영님의 댓글

박재영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윤재가 가장 사람다운 인물이라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도 글을 쓰신데로 '옳은 공감'을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도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면 가상의 인물에게는 쉽게 연민을 느끼거나 동정을 하면서 제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고 더 둔감해질 때가 많은 것 같기 때문이거든요. 정말 우리가 원할 때만 골라서 공감하지 않도록 예민해져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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