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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과 의열단

급격한 시대흐름 속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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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쇄매체 허광혁 비평단 Posted18-01-24 14:22 View652회 Comments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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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개봉하여 약 1200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 2016년 개봉하여 750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김지운 감독의 밀정과 같이 최근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실제로 활동했던 여러 독립투사들의 활약 역시 재조명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러 영화에 중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궁금증을 일으킨 독립투사가 있는데,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20세기 초의 열강들의 패권 다툼과 참혹한 전쟁, 그리고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의 최전선에는 그가 있었다.

 

 

약산 김원봉, 그는 대체 누구인가.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1910, 그의 나이 13세에 일본에 의해서 국권이 침탈당했고, 당시 다니던 동화중학 전홍표 교장에게 철저한 배일사상을 교육받았다. 이것이 위대한 독립운도가 김원봉의 이념적 토대가 설립된 시기였다. 이후 중국으로 넘어가 교육을 계속 받았고, 국내의 여러 독립투사들이 모금하여 새운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당시 외교적 노선을 추구하던 그는 끊임없는 폭력과 저항을 통해서 동포들을 애국심과 배일감정을 고취시키고 일대의 민중적 폭력을 고무하는 것이 독립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191110, 만주 지린성에서 13인의 동지들과 함께 항일 무력독립투쟁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열단의 우두머리인 의백에 추대되었다. 의열단은 공약 10‘5파괴 7가살 원칙(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적 토호열신)에 따라 국내 일제 기관 공격 등과 같은 다양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의열단원인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사건과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사건 등이 있다. 김원봉은 일제 시대 당시의 현상금이 320억 원으로 1위였고, 이는 최근 오사마 빈 라덴이 나타나기 전까지 가장 높은 현상금이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런 소규모의 폭력투쟁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한다. 이후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또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는데,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 포로 심문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일부 의용대 대원들이 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서 화북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김원봉의 세력을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화북 지역의 공산당과 대립하고 있던 국민당의 장제스의 눈 밖에 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그는 김구가 이끌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추임하게 되고 조선의용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대한광복군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하면서 대한민국은 갑작스럽게 광복을 맞게 된다. 하지만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 받쳤던 김원봉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중국도 일본도 아닌 광복 이후의 조국에서 친일파이자 악덕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피체되어 온갖 수모와 고문을 받았다. 이에 김원봉은 큰 충격을 받고, 이후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남북협상 당시 김구와 같이 북한으로 가 회담에 참석하고 월북했다. 이후의 김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다 결국 1958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원봉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

  요즘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참 답답하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입씨름만 계속하고 있다. 물론 정치인들 입장에서 보면 기세싸움에서 밀리자 않고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하고 이로 인한 정쟁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정치인들이 이런 문제를 다른 중대 사안들과 연결시키는 행동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아예 중요사안들에 대해서 논의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김원봉의 삶을 다시 보자. 당시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계열로 분열되었고 몇 번의 좌우합작 운동을 제외하고는 서로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 독립운동의 힘은 약해졌고, 광복 이후 한반도 분단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이와 달리 김원봉은 어느 한 이념에 종속되지 않았다. 김원봉에게는 단순한 이념보다는 조국의 독립, 그 목표 자체가 중요했고 이념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김원봉은 조국의 독립에 힘이 된다면 공산당이든 국민당이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우리나라 정치도 김원봉의 이런 점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물론 국가에 중대한 사안이면 아무런 정치적 논의도 없이 통과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고 그런 여러 생각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다만 정쟁을 하되, 정말 국익에 중요시되는 사안을 결정할 때는 잠시 정쟁을 접고 진지하게 논의하고 합의하는 협치의 자세를 보였으면 좋겠.

 

 

격동의 19·20세기, 김원봉은 당시 행해지던 외교독립노선을 무척이나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김원봉은 국가존망이나 민족사활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외국인들에게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민족이 직접 혁명의 주체가 되어 일제를 타도할 수 있도록 고무하는 의열단을 창단했다. 요즘 시대는 어떨까? 요 근래의 한반도 근처의 국제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그리고 한국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이자,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공략해야 되는 큰 숙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일각에서 근래 한반도 문제에 있어 우리나라를 무시하고 외국끼리 한반도 문제를 결정하는 코리안 패싱을 우려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제를 우리나라가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억울한 일이 아니라 외교적 재앙이다. 김원봉 선생이 그랬듯 우리도 단순히 외국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버리고 스스로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된다.

 

 

 

약산 김원봉은 그 누구보다도 조국 독립과 민족부흥을 위해서 활동했지만, 그는 광복한 조국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광복 직후에는 그가 그렇게 타도하고 싶어 했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했고, 분단 이후 강력한 반공정책을 펴던 남한에서는 월북을 했단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반대하고 숙청당했다는 잊혀졌다. 이념을 떠나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한 그였지만 결국 그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만약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었다면, 이념을 떠나서 민족이 하나 될 수 있었다면 김원봉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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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출처]
내용출처: <약산과 의열단>_박태원 지음_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_김상웅 지음_시대의 창
[사진출처]
네이버 책: <약산과 의열단>: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685868
인쇄매체 허광혁 비평단
E-mail : ma06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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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님의 댓글

김혜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이 독립운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현상금만 봐도 알 수 있듯 일제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광복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 이념을 따랐다는 점 때문에 그 활약이 교과서에서도 썩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아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비평단 분의 글을 읽고 좀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이념을 따지지 않았다는 인물의 특성과 그런 특성을 지금의 정치인들의 행태에 적용시키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글 많이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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